『日帝の収奪』について
「일제의 수탈」에 대해서






以下の文は統計資料の補充などを待って、継続討論中の文である。
史料などの追加があれば順次内容を訂正し、継続して討論を行い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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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では「日帝の収奪」という言葉が使われる。
ここでは特に日本による『土地』と『米』に対する『収奪』や、経済政策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

日本でも従来、日本の侵略を非難する立場に立った左翼系の学者により研究が行われ、植民地支配の象徴として考えられてきた。『土地調査事業』により、大半の農民が土地を失ったと言われてきたし、朝鮮から米を奪ったり、会社の設立を制限したりしたという研究が大勢を占めていた。

しかし、疑問もある。

1)土地調査事業それ自体は近代的国家の体制を築く上で必要な事業である。

目的も土地の所有権を明確化する意図で行われたとされている。
朝鮮の土地を収奪する意図があったとする理由は無いと思う。
全錫淡他著、梶村秀樹他訳『朝鮮近代社会経済史』の記述によれば、日本は耕地面積のうち13万4千余町歩を国有地とし、未墾地とされた土地、90万余町歩接収した。
当時の課税地総面積286万7千余町歩に対して考えると、耕地面積として約5%未墾地を含めた接収分を入れると約40%の土地を収奪した計算になる。

だが、実は土地調査事業により課税地総面積は424万8千余町歩と確認された。
これは、李氏朝鮮末期の政治の混乱により正確な統計が行われていなかったことに由来する。

この計算だと未墾地を含めても26%となり、未墾地を統計に入れるのは適当でないと考えればさらに少なくなる。
さらに、日本人地主に有利だったとされるが、実際には日本人入植者の開墾により、耕地面積が1.4倍に増加したという統計もある。(東畑精一 他『朝鮮米穀経済論』(日本学術振興会))

しかしながら私は朝鮮の農民が貧窮したという事実は否定しない。

急速な資本化、近代化の副作用として経済、産業構造が変化し、農民が貧窮したという実例は西洋史にも多くある。当時の朝鮮半島には貨幣経済の基盤が存在しなかったことから、経済的弱者である農民が結果として土地を売らざるをえなくなったりしたケースもあると思う。
しかしながら、これらの現象をもって日本の作為として考えるのは十分で無いと私は思う。

参考URL
http://www.jiyuu-shikan.org/frontline/sugimoto/kyoukasho.html
日本語のテキストの翻訳は
http://ocn.amikai.com/amitext/indexUTF8.jsp
が使えると思う。


2)朝鮮会社令について。

この問題については過去に書いたこともある。
朝鮮会社令とは1910−1920にかけて施行された、朝鮮半島における会社設立の届け出・認可制度のことである。

李氏朝鮮末期、朝鮮半島には産業と呼べるものは全く存在せず、無慈悲で無能な支配階級と搾取される貧民しかいなかった。
貧弱な商業基盤しか持たず、そもそも貨幣経済が存在しなかった。
そのような状態で資本化が進行すればどうなる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19世紀の同時期に実例がある。
三国協商時のロシアに於いては資本化が他の西欧諸国よりもさらに急速に行われたために貧富の差が拡大し労働者はいっそう搾取され、後の共産革命の遠因ともなった。

日本に於いても明治時代の都市住民の貧窮についての記録は多い。

もし、朝鮮半島で無制限に資本化が行われれば、たちまち未発達な商業基盤しか持たない朝鮮産業は壊滅し、資本家と労働者の貧富の差はさらに広がったと私は思う。

目的も、経済の知識がない朝鮮人による利権目的の会社乱立など、詐欺的な行為から一般の朝鮮人を保護する目的であったとされている。

ただし、許認可などに偏見があった可能性は否定しない。

しかしながら、現実には朝鮮半島における朝鮮人経営の企業の数は少なくは無かったし、総督府はむしろ朝鮮半島の工業化を推進していたとも言える。

参考URL
http://www.ier.hit-u.ac.jp/COE/Japanese/Newsletter/No.11.japanese/an.htm
http://japanese.joins.com/transboard/kor_bbs/content.html?tname=history&num=21442&page=1&startpage=1&oDest=num&sc=desc

(以下、上記URL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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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表 製造業生産額の業種別構成比 (単位:%、合計100)
年次 紡績工業 金属鉱業 機械器具
製造業
窯 業 化学工業 製材・
木製品工業
印刷・
製本業
 食料品工業  その他工業
     製糖工業


1912 0.7 2.6 0.7 2.5 19.3 1.9 0.8 67.5 (44.7) 4.9
1915 0.9 3.2 0.5 1.5 14.4 0.8 0.8 75.7 (54.5) 3.4
1920 0.8 3.2 1.8 3.1 13.3 1.4 0.7 73.4 (57.3) 2.3
1925 1.7 2.4 1.4 2.2 12.9 2.1 0.9 72.3 (54.3) 4.2
1930 0.8 2.4 1.7 2.3 7.8 2.2 1.0 78.4 (63.3) 3.5
1935 1.0 3.9 1.6 2.1 9.1 2.2 1.0 75.3 (56.2) 3.8
1940 2.4 7.7 3.1 3.1 11.4 2.5 1.2 65.4 (39.4) 4.3


1914 11.6 14.9 2.0 3.7 9.1 1.1 2.8 43.2 11.6
1920 16.0 6.0 3.6 4.1 11.5 3.8 3.8 38.0 16.9
1925 14.8 6.0 3.4 3.3 15.6 4.3 4.3 41.6 11.0
1930 16.1 6.2 2.0 3.4 15.3 1.7 1.7 46.2 9.2
1935 15.5 12.5 2.0 2.9 25.4 1.4 1.4 34.7 5.6
1940 18.6 8.0 4.0 3.7 33.7 1.9 1.9 25.0 5.0

資料:溝口敏行・梅村又次編 『 旧日本植民地経済統計 −推計と分析− 』、東洋経済新報社、1988年。


第2表 純生産物比 (工業生産物 / 農業生産物) (単位:%)
     日 本   台 湾   朝 鮮 
 1904 30.7 22.8  
1906 41.3 43.6  
1908 43.0 24.7  
1910 50.6 59.8  
1912 52.2 51.3 5.8
1914 53.7 45.8 6.8
1916 66.9 67.8 12.6
1918 78.7 67.0 12.5
1920 67.4 69.3 10.4
1922 86.0 55.2 10.6
1924 85.0 67.2 11.1
1926 95.0 58.4 15.0
1928 105.9 55.7 15.2
1930 114.6 60.4 14.6
1932 123.7 49.6 16.7
1934 161.0 60.1 25.4
1936 165.0 67.2 37.2
1938 212.9 58.9 33.9

資料:溝口・梅村前掲書。


3表 朝鮮と台湾における民族別工場数 (単位:個)
朝   鮮 台   湾
   朝鮮人   日本人   合 計  日本人の比率
(%)
 台湾人   日本人   合 計  日本人の比率
(%)
 1914 175 471 646 72.9     1,309  
1920 943 1,125 2,068 54.4     2,695  
1925 2,005 2,085 4,090 51.0     3,983  
1930 2,233 2,013 4,246 47.4 5,275 520 5,795 9.0
1932 2,492 2,113 4,605 45.9 5,674 593 6,267 9.5
1935 3,285 2,345 5,630 41.7 6,352 654 7,006 9.3
1938 3,963 2,627 6,590 39.9 7,291 719 8,010 9.0

資料: 木村光彦 「 植民地下台湾、朝鮮の民族工業 」 名古屋大学産業科学研究所、Discussion paper No.3,1981年10月。
許 粹烈 「 日帝下朝鮮人工場の動向 」( 中村哲也編 )『 近代朝鮮工業化の研究 』 日本評論社、1993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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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米収奪について。

これについてはいくつか疑問がある。
米以外の作物について。

朝鮮半島には寒冷地もあり、必ずしも稲作に適した土地ではない。安定した食糧生産のためには米以外の作物を重要視したほうがいい。これらの生産高や消費量も知りたい。事実、私の父は戦時中に満州から北朝鮮の付近にいたが、麦や高粱、ほかの雑穀などが流通していたという。

換金作物としての米

当時、まだ経済が発展していなかった半島においては主な商品として米を売らざるをえ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むしろ、現金化するための商品として考えられていたのではないか。

参考URL
http://japanese.joins.com/transboard/kor_bbs/content.html?tname=history&num=23611&page=1&startpage=1&oDest=num&sc=desc

また、当時は日本の東北地方なども貧しかったために、安い朝鮮産の米による打撃を受けたという。

(以下、上記URL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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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東京における日本米・朝鮮米の市場価格比較(一石当たり円)

年平均 深川標準中米 朝鮮標準中米 価格差
1915〜18年 19.86 17.74 2.12
21・24年 34.69 31.90 2.79
26〜29年 33.74 31.93 1.81
33年 21.42 21.54 −0.12

東畑精一・大川一司「朝鮮米穀経済論」

 
2.朝鮮米の貿易(単位 千円)

年平均 米穀移輸出額
25〜27 185,829
30〜32 131,163

農林大臣官房統計課編「昭和13年米統計表」


3.朝鮮米の移輸出量 (単位 石)

年平均 輸移出量
25〜27 5,671,076
30〜32 7,246,857

鮮米協会編「朝鮮米の進展」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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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とめ

『日本の影響』により、良い変化だけではなく、悪化した面もあった可能性があることまで否定する気はない。朝鮮総督府の政策についても、全て良かったと強弁する意志はない。
おそらく、『理念』とは別に『運用』においては偏見や誤解により朝鮮側に不利益な結果となったこともあると思う。

しかし、日本人の悪意により収奪が行われたと断定するには現時点では根拠が不足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る



[韓国語 翻訳文]



이하의 문장은 통계 자료의 보충등을 기다리고, 계속 토론중의 문장이다.
사료등의 추가가 있으면 차례차례 내용을 정정해, 계속하고 토론을 실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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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일제의 수탈」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된다.
여기에서는 특히일본에 의한 「토지」와 「미」에 대한 「수탈」이나, 경제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일본에서도 종래, 일본의 침략을 비난 하는 입장에 선 좌익계의 학자에 의해 연구를 해 식민지 지배의 상징으로서 생각되어 왔다.「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대부분의 농민이 토지를 잃었다고 말해져 왔고, 조선으로부터 미를 빼앗거나 회사의 설립을 제한하거나 했다고 하는 연구가 여럿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도 있다.

1) 토지 조사 사업 그 자체는 근대적 국가의 체제를 쌓아 올리는데 있어서 필요한 사업이다.

목적도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화하는 의도로 행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조선의 토지를 수탈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주석담외저, 미촌히데키외 (뜻)이유 「조선 근대사회 경제사」의 기술에 의하면, 일본은경지 면적 중13만 4천여정보를 국유지로 해,미개간지로 여겨진 토지, 90 일만여 정보도접수했다.
당시의 과세지총면적 286만 7천여정보에 대해서 생각하면,경지 면적으로서 약5%.미개간지를 포함해라 접수분을 넣으면약40%의 토지를 수탈 한 계산이 된다.

하지만,실은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과세지총면적은 424만 8천여정보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이씨 조선 말기의 정치의 혼란에 의해 정확한 통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래한다.

이 계산이라면미개간지를 포함해도26%가 되어,미개간지를 통계에 넣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게다가 적게 된다.
게다가 일본인 지주에게 유리했다고 되지만, 실제로는일본인 입식자의 개간에 의해, 경지 면적이 1.4배에 증가했다고 하는 통계도 있다.(도하타 세이이치외 「조선 미곡 경제론」(일본 학술 진흥회))

그렇지만 나는 조선의 농민이 빈궁했다고 하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급속한 자본화, 근대화의 부작용으로서 경제, 산업구조가 변화해, 농민이 빈궁했다고 하는 실례는 서양사에도 많이 있다.당시의 한반도에는 화폐 경제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경제적 약자인 농민이 결과적으로 토지를 팔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한 케이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일본의 작위로서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 URL
http://www.jiyuu- shikan.org/frontline/sugimoto/kyoukasho.html
일본어의 텍스트의 번역은
http://ocn.amikai.com/amitext/indexUTF8.jsp
하지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조선 회사령에 대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에 쓴 적도 있다.
조선 회사령과는 1910-1920에 걸쳐서 시행된, 한반도에 있어서의 회사 설립의 신고·인가제도이다.

이씨 조선 말기, 한반도에는 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무자비하고 무능한 지배계급과 착취되는 빈민 밖에 없었다.
빈약한 상업 기반 밖에 가지지 않고,원래 화폐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태로 자본화가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그렇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19 세기의 동시기에 실례가 있다.
삼국 협상시의 러시아에 있어서는 자본화가 다른 서구 제국보다 한층 더 급속히 행해졌기 때문에 빈부의 차이가 확대해 노동자는 한층 더 착취되어 후의 공산 혁명의 원인이나 되었다.

일본에 있어서도 메이지 시대의 도시 주민의 빈궁에 대한 기록은 많다.

만약, 한반도에서 무제한하게 자본화를 하면,금새 미발달 상업 기반 밖에 가지지 않는 조선 산업은 괴멸 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빈부의 차이는 한층 더 퍼졌다와 나는 생각한다.

목적도,경제의 지식이 없는 조선인에 의한 이권 목적의 회사 난립 등, 사기적인 행위로부터 일반의 조선인을 보호하는 목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다만, 허인가 등에 편견이 있던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현실에는 한반도에 있어서의 조선인 경영의 기업의 수는 적지는 않았고, 총독부는 오히려 한반도의 공업화를 추진하고 있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참고 URL
http://www.ier.hit- u.ac.jp/COE/Japanese/Newsletter/No.11.japanese/an.htm
http://japanese .joins.com/transboard/kor_bbs/content.html? tname=history&num=21442&page=1&startpage=1&oDest=num&sc=desc

(이하, 상기 URL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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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표 제조업 생산액의 업종별 구성비 (단위:%, 합계 100)
연차 방적 공업 금속 광업 기계 기구
제조업
요업 화학공업 제재·
목제품 공업
인쇄·
제본업
 식료품 공업  그 외 공업
     제당 공업


1912 0.7 2.6 0.7 2.5 19.3 1.9 0.8 67.5 (44.7) 4.9
1915 0.9 3.2 0.5 1.5 14.4 0.8 0.8 75.7 (54.5) 3.4
1920 0.8 3.2 1.8 3.1 13.3 1.4 0.7 73.4 (57.3) 2.3
1925 1.7 2.4 1.4 2.2 12.9 2.1 0.9 72.3 (54.3) 4.2
1930 0.8 2.4 1.7 2.3 7.8 2.2 1.0 78.4 (63.3) 3.5
1935 1.0 3.9 1.6 2.1 9.1 2.2 1.0 75.3 (56.2) 3.8
1940 2.4 7.7 3.1 3.1 11.4 2.5 1.2 65.4 (39.4) 4.3


1914 11.6 14.9 2.0 3.7 9.1 1.1 2.8 43.2 11.6
1920 16.0 6.0 3.6 4.1 11.5 3.8 3.8 38.0 16.9
1925 14.8 6.0 3.4 3.3 15.6 4.3 4.3 41.6 11.0
1930 16.1 6.2 2.0 3.4 15.3 1.7 1.7 46.2 9.2
1935 15.5 12.5 2.0 2.9 25.4 1.4 1.4 34.7 5.6
1940 18.6 8.0 4.0 3.7 33.7 1.9 1.9 25.0 5.0


資料:미조구치 토시유키·매촌 또 차편  「 구일본 식민지 경제 통계 - 추계와 분석 - 」, 토요 경제신보사, 1988년.

제2표순 생산물비 (공업 생산물 / 농업 생산물) (단위:%)
     일본   대만   조선 
 1904 30.7 22.8  
1906 41.3 43.6  
1908 43.0 24.7  
1910 50.6 59.8  
1912 52.2 51.3 5.8
1914 53.7 45.8 6.8
1916 66.9 67.8 12.6
1918 78.7 67.0 12.5
1920 67.4 69.3 10.4
1922 86.0 55.2 10.6
1924 85.0 67.2 11.1
1926 95.0 58.4 15.0
1928 105.9 55.7 15.2
1930 114.6 60.4 14.6
1932 123.7 49.6 16.7
1934 161.0 60.1 25.4
1936 165.0 67.2 37.2
1938 212.9 58.9 33.9


자료: 미조구치·매화 무라사키게서.

3표 조선과 대만에 있어서의 민족별 공장수 (단위:개)
조선 대만
  조선사람  일본인   합계  일본인의 비율
(%)
 대만인   일본인   합계  일본인의 비율
(%)
 1914 175 471 646 72.9     1,309  
1920 943 1,125 2,068 54.4     2,695  
1925 2,005 2,085 4,090 51.0     3,983  
1930 2,233 2,013 4,246 47.4 5,275 520 5,795 9.0
1932 2,492 2,113 4,605 45.9 5,674 593 6,267 9.5
1935 3,285 2,345 5,630 41.7 6,352 654 7,006 9.3
1938 3,963 2,627 6,590 39.9 7,291 719 8,010 9.0


자료: 키무라 미츠히코 「식민지 시모다이 완, 조선의 민족 공업 」 나고야 대학 산업 과학 연구소, Discussion paper No. 3,1981년 10월.
許 粹烈  「일제하 조선인 공장의 동향 」(나카무라 테쓰야편 ) 「근대 조선 공업화의 연구 」일본 평론사,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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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쌀의 수확탈에 대해.

이것에 대해서는 몇개인가 의문이 있다.
·미 이외의 작물에 대해.

한반도에는 한랭지도 있어, 반드시 벼농사에 적절한 토지는 아니다.안정된 식량 생산을 위해서는 미 이외의 작물을 중요시하는 편이 좋다.이러한 생산고나 소비량도 알고 싶다.사실, 나의 아버지는 전시중에 만주로부터 북한의 부근에 있었지만, 보리나 고량, 다른 잡곡등이 유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환금 작물로서의 미.

당시 , 아직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반도에 있어 주된 상품으로서 쌀을 팔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는 없는가?오히려,현금화하기 위한 상품으로서 생각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참고 URL
http://japanese .joins.com/transboard/kor_bbs/content.html? tname=history&num=23611&page=1&startpage=1&oDest=num&sc=desc

또, 당시는 일본의 동북지방등도 궁핍했기(위해)때문에, 싼 조선산의 미에 의한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하, 상기 URL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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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쿄에 있어서의 일본쌀·조선미의 시장가격 비교(일석 당 엔)

연평균 후카가와 표준 중미 조선 표준 중미 가격차
1915〜18年 19.86 17.74 2.12
21・24年 34.69 31.90 2.79
26〜29年 33.74 31.93 1.81
33年 21.42 21.54 −0.12

도하타 세이이치·오오카와1사 「조선 미곡 경제론」


2. 조선미의 무역(단위 천엔)

연평균 미곡이 수출액
25〜27 185,829
30〜32 131,163

농림 수산부 장관 관방 통계과편 「쇼와 13년미통계겉」


3. 조선미의 이수출양 (단위 돌)

연평균 수이출양
25〜27 5,671,076
30〜32 7,246,857

선미협회편 「조선미의 진전」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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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일본의 영향」에 의해, 좋은 변화 만이 아니고, 악화된 면도 있던 가능성이 있는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모두 좋았다고 강변 하는 의지는 없다.
아마, 「이념」과는 별도로 「운용」에 대해 편견이나 오해에 의해 조선 측에 불이익한 결과가 된 적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일본인의 악의에 의해 수탈을 했다고 단정하려면 현시점에서는 근거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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